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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시인에게 배운 카피

by 풋카피닷컴 2016.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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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지붕에 대하여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저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 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는 녹슬어 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 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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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했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을 몰랐었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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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은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 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 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이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금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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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밭 가에서

비가 뚝 그치자 
마늘밭에 햇볕이 내려옵니다
마늘순이 한 뼘씩 쑥쑥 자랍니다 
나는 밭 가에 쪼그리고 앉아 
땅 속 깊은 곳에서
마늘이 얼마나 통통하게 여물었는지를 생각합니다 
때가 오면 
혀 끝을 알알하게 쏘고 말
삼겹살에 쌈 싸서 먹고 
짱아찌도 될 마늘들이
세상을 꽉 껴안고 굵어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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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고여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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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연애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가도 못하고, 가만 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리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 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랜 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 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뜬다
연애 시절아, 그것 봐라 
사랑은 쓰러진 그리움이 아니라
시시각각 다가오는 증기기관차 아니냐 
그리하여 우리 살아 있을 동안
삶이란 끝끝내 연애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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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테고
하굣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것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냐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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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잡아당긴다


앞에 놓인 철길을 잡아당기며 달리는 기차
누군가 잡아당겨야 팽팽해지는 철길
서울에서 목포까지, 혹은
브라지보스똑에서 뻬째르부르끄까지
마치 상장을 말아 쥐고 집을 향해 뛰는
초등학생처럼 식식거리는 기차
어느 플랫폼에 기차가 잠시 멈추면
잡고 있어도 당기지 않으면
힘이 빠진 철길은 투덜거리며
기차를 놓아두고
몇걸음 혼자 걸어가본다
지평선을 넘지 못하는 철길
지평선을 넘으려면 기차가 잡아당겨줘야 한다
자기 앞에 놓인 것은 무엇이든지 잡아당기는
눈보라를 잡아당기는
바람을 잡아당기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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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런닝구

 
황달 걸린 것처럼 누런 런닝구 ! 
 
대야에 양잿물 넣고 연탄불로 푹푹 삶던 런닝구 
 
빨랫줄에 널려서는 펄럭이는 소리도 나지 않던 런닝구 
 
백기(白旗)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걸려 있던 런닝구 
 
어린 막내아들이 입으면 그 끝이 무릎에 닿던 런닝구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게를 많이 져서 구멍이 숭숭 나 있던 런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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